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쿠로코의 농구"을(를) 전체 찾아보기

쿠로코의 농구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현주엽 . . . . 68회 일치
         {{농구 선수 정보
          | 대학교 = [[고려대학교|고]][[고려대학교 농구부|려대학교]] <br />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대학원]]
          | 국가대표팀1 = [[대한민국 U-19 농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 U-19]]
          | 국가대표팀2 =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메달 스포츠|남자 [[농구]]}}
         '''현주엽'''(玄周燁, [[1975년]] [[7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前 [[대한민국 프로 농구|프로 농구 선수]], 농구 해설가이자 현재는 [[창원 LG 세이커스]]의 감독이다.
         [[1975년]] [[7월 27일]]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의류제조업을 하는 아버지 현진구(玄晉具)와 前 국가대표 농구 선수인 어머니 홍성화(洪性華) 사이에서 슬하 3남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의 위로는 세 살 위의 두 쌍둥이 형이 있다. 그의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延州)이고 [[종교]]는 [[불교]]이며 신장은 195cm이고, 체중은 120kg이다.
         그는 [[휘문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학사]] 및 [[고려대학교|동 대학원]] [[석사]] [[졸업]]하였다. [[1998년]] [[서울 SK 나이츠|청주 SK 나이츠]]에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되어 프로농구에 데뷔하였다. 그의 현역 [[대한민국 프로 농구|프로 농]][[농구|구 선수 시절]] [[닉네임]]은 '''매직히포''', '''포인트포워드'''이며 역대 대한민국 프로 농구 선수 중에는 가장 NBA급에 근접했던 선수였다. [[2002년 아시안 게임|부산 아시안 게임]]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의 결승전에서 4쿼터 4초를 남기고 돌파 및 레이업 슛을 성공시키면서(이른바 까마귀 작전)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으며, 연장전에서 6득점을 기록하여 [[대한민국]]을 [[1982년 아시안 게임|뉴델리 아시안 게임]] 이후 20년 만에 [[금메달]]을 따는데 기여하였다.
         * [[1998년]]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농구부|경영학과]] [[학사]] 졸업
         서울 도성초등학교 6학년 시절 우연히 농구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휘문중학교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당시 키도 작고 농구 실력이 부족하였던 그는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으나 공교롭게도 서울 휘문중학교로 학교를 배정받아 농구특기생이 아닌 일반학생으로 휘문중학교를 입학하고 다시 농구부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하여 비교적 늦은 나이인 휘문중학교 1학년 때 농구를 시작하게 된 현주엽은 1학년 동안은 늘 벤치를 지켰으며 2학년이 돼서야 코트에 첫 출전을 하게된다. 현주엽은 휘문중학교 2학년 때까지 자신의 어머니가 농구선수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자신의 경기를 관람하러 온 어머니를 현주엽의 농구 코치가 알아보는것이 계기가 되었다.<ref name=sports>SPORTS 2.0 2008년 10월 3호</ref> 운동선수 생활을 하였던 어머니는 현주엽이 농구선수가 된 후 항상 주위 사람들이나 선후배들에게 예의를 지킬것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현주엽은 그 당시 NBA 농구 비디오를 보면서 농구연습을 했고 그의 롤모델 농구선수는 매직 존슨이었다. 매직 존슨을 동경하여 2008년까지 줄곧 백넘버 32번을 달았다.
         현주엽이 대학진학후 첫 출전한 대회인 MBC배 대학농구에서 고대는 연대를 맞아 28점차로 대패하게 된다. 이 경기후 고대는 선수 전원이 머리를 짧게 깎고 절치부심하여 패자부활전을 통해 결승에 올라와 다시 연대를 만나 승리를 거두었고, 다시 최종결승전에서 고대는 연대에 시종일관 리드를 당했으나 시합종료 1분을 남기고 고대 양희승이 동점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이 동점상황에서 현주엽이 속공으로 종료 직전 0.4초를 남기고 회심의 레이업을 시도하였고 연대 김택훈의 반칙으로 얻은 자유투 2개를 모두 침착하게 성공시키면서 고대의 우승을 이끌었다.<ref>경향신문 1994년 4월3일 “안암골 호랑이 "大(대)역전쇼””</ref> 대학무대 첫 대회에서 세간의 기대만큼의 활약을 벌이지 못한 현주엽은 대회 후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이번 대회를 통해 모든면에서 선배들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고교농구와 대학농구의 엄청난 차이를 느꼈다고 대답했다.<ref>스포츠서울 1994년 4월 2일 [http://kids.olivercho.com/SportsLeisure/148 “현주엽,고려 우승의 "일등공신",인터뷰”]</ref> 그러나 이 후 현주엽은 파워 포워드로서의 팀내 입지를 탄탄히 다지게 되고, 고대는 전희철,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신기성이라는 베스트 5 체제를 구축하며 대학무대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처럼 고려대학교가 연승가도를 질주하자 세간의 관심사는 고려대가 70년대말에 이룩했던 최다연승 49연승을 깨고 50연승을 달성할것인가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1995년 가을철 대학농구 연맹전 예선 첫 경기에서 현주엽이 발목 부상으로 빠진 고대는 당시 약체였던 홍대에 3점차로 덜미가 잡히며 20연승에서 연승을 마감했다.<ref>경향신문 1995년 10월30일 “고려대 20연승 마감 약체 홍익에 덜미”</ref> 이후 고대는 다시 한동안 연승을 이어갔지만 50연승에 근접하지는 못하였다. 고려대학교는 충분한 전력을 갖췄음에도 현주엽이 졸업하기전까지 끝내 농구대잔치에서는 연세대학교가 이루어내었던 대학팀 우승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1998년 3월 9일 힐튼호텔에서 열린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현주엽은 전체 1순위로 청주 SK의 지명을 받았다. 당시 SK의 안준호 감독은 드래프트에서 구슬 뽑기로 1순위 지명권을 받게 되자 ‘우승이야’를 외쳤다고 한다. SK는 그 지명권으로 바로 현주엽을 지명했고 이렇게 해서 현주엽은 SK에 이미 영입돼 있던 [[서장훈]]과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SK의 운명은 안준호의 바람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또 다른 기대주였던 외국인 선수 토니 러틀랜드의 부진과 더불어, 현주엽과 서장훈은 미묘한 자존심 대결과 포지션의 중복으로 부조화를 보였고 이 때문에 SK는 우승은커녕 플레이오프조차 오르지 못하고 만다. 그 책임을 물어 1998년 11월 26일 안준호 감독은 시즌 도중 경질되고 기아의 기술고문이었던 최인선이 SK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현주엽의 프로 첫해 개인성적은 뛰어났다. 34경기에 출전하여 평균 23.94 득점, 6.35 리바운드, 4.65 어시스트를 기록했다.<ref name=sports /> 이듬해 시즌에서 현주엽은 스몰포워드로의 성공적인 변신을 이루어내며 서장훈과 전년보다 나아진 팀웍을 보였다. 이에 SK는 정규시즌 1위를 달리고 있었으나, 시즌 트레이드 신청 마감일 하루전인 199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날 SK는 현주엽을 골드뱅크의 조상현 + 현금 4억원과 맞바꾸는 초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하며 대담한 승부수를 띄웠다.<ref>경향신문 1999년 12월25일 “현주엽=조상현+4억원'빅딜'”</ref><ref>[최창환의 백 투 더 KBL] [http://news.jumpball.co.kr/news/view/cd/82/seq/4.html ‘X-MAS 빅딜의 추억’ 현주엽-조상현 맞트레이드]</ref> 이는 최인선 감독이 이원재 단장에게 한 강력한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최인선은 현주엽의 3번자리(스몰 포워드)가 불만이었다. 우승을 위해 3번에 올라운드 플레이어보다 기동력 좋고 확실한 슛터를 원했던 그는, 이대로라면 챔피언전에 진출하더라도 현대를 만나면 승산이 없을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시 SK는 창단 이후 현대에게 12전 전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트레이드 직후, SK는 곧바로 트레이드 효과를 보이면서 승승장구, 결국 챔피언전에서 만나게 된 현대를 4승 2패로 누르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실패했으면 최악의 자충수로 기록됐을 이 트레이드는, SK의 우승으로 인해 ‘우승을 위한 마지막 퍼즐찾기’로 농구역사에 기록되었다.
         01-02 시즌 농구대잔치에서 상무는 김주성이 이끄는 전년도 우승팀 중앙대를 제압하며 우승을 하였고 현주엽은 대회 최우수선수상(MVP)과 리바운드상을 받았다.<ref>동아일보 2002년 1월16일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20&article_id=0000107547 “상무, 중앙대 꺾고 농구대잔치 첫 우승”]</ref>
         현주엽은 상무 복무중 출전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남자 농구 결승전에서 중국에 극적 역전승을 이끌어 내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ref>연합뉴스 2002년 10월14일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0255351 “아시안게임-<농구> 한국, 20년만의 금메달(종합)”]</ref> 당시 중국은 NBA 지명 1순위에 빛나는 야오밍이 포함되어 있었고, 한국은 시종일관 중국에 리드를 당해 종료 3분 17초를 남기고 71-84로 뒤지며 패색이 짙었다. 이때 김진 대표팀 감독은 작전타임을 부른후 현주엽과 김승현을 교체 투입하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현주엽의 미들슛과 골밑돌파, 그리고 김승현의 가로채기와 어시스트가 빛을 발하며 한국팀은 무더기 득점을 엮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4쿼터 종료 4.7초를 남기고 현주엽이 드리블에 이은 대담한 골밑돌파로 레이업슛을 성공, 동점을 만들면서 승부는 연장전으로 넘어갔다. 연장전에서도 김승현과 현주엽의 활약은 이어졌고 102-100로 경기를 마무리 지으며 20년만에 남자농구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현주엽의 상무 입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골드뱅크는 팀명을 코리아텐더로 변경하였고, 이후 재정난에 시달리던 코리아텐더는 현주엽의 복귀가 몇달 지나지 않은 2003년 11월, 농구단을 KTF에 매각하였다. KTF에서는 상무 시절 인연을 맺은 [[추일승]] 감독이 사령탑을 맡았다. 두번의 무릎수술을 거치며 현주엽의 플레이 스타일은 포스트업보다 어시스트 위주의 외곽플레이로 바뀌어 갔고, 그의 전매특허인 몸을 날려 레이업슛을 쏜 후 바닥으로 쓰러지는 플레이 또한 횟수가 줄어갔다. 이 무렵부터 포인트 포워드라는 말을 듣기 시작하였다.
         2009년 6월 24일, 현주엽은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그 다음날 기자회견을 가졌다. 기자회견장에는 무릎수술 후유증으로 목발을 짚고 들어섰다. 선수생활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는 질문에 [[2002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땄을 때를 꼽았고 아쉬운 것으로는 우승을 해보지 못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마지막 소감으로는 팬들에게 농구를 좀 잘했던 선수로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후에는 잠시 농구와 거리를 두면서 살고 있다가 농구 해설가로 데뷔하며 마이크를 잡았고, 2017년에 계약이 만료된 김진의 후임으로 [[창원 LG 세이커스]]의 감독으로 선임됐다.
         현주엽은 화려하였던 개인성적에 비하여 유독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1990년대 그와 함께 대학농구 전성기를 보냈던 농구대잔치 스타들이 프로에 와서 대부분 한번 이상의 우승을 경험해 본 것에 비해 현주엽은 9년의 프로생활 동안 단 한번도 챔피언 결정전에 나가보지 못하였다. 99-00시즌 SK가 정규리그 1위를 달리며 팀을 우승시키는가 했지만 시즌 도중 트레이드되며 SK의 우승을 지켜봐야만 했고, 그 이후로 우승에 가장 근접했던 순간은 06-07시즌 LG에서 활약하고 있을때로 팀을 정규리그 2위에 올려놓으며 우승 가능성을 엿보기도 했지만 플레이오프 4강전에서 LG의 외국인 선수 파스코의 심판 폭행사건이 얽히면서 KTF에게 패하고 만다. 그나마 아시안 게임 금메달이 유일한 우승 경력이다.
         *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1년 선배 [[윤제한]], 2년 선배 [[박준영 (농구 선수)|박준영]]에 밀려 벤치워머였고, 이 때의 낙은 같은 벤치워머인 [[서장훈]]과 훈련을 제끼고 수영장에 놀러가는 것이었다고 한다(MBC 무릎팍 도사-2013년 8월 15일 서장훈편).
  • 이승현(농구선수) . . . . 61회 일치
          * [[농구 관련 인물(한국)]]
         [[분류:농구 선수]] [[분류:파워 포워드]] [[분류:구미시 출신 인물]] [[분류:1992년 출생]]
         ||||<:><#000000> {{{#ffffff 국군체육부대 상무 농구단 No. 34}}} ||
         ||<#34007f><:> '''[[2015~2016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ffffff 2016}}}]]''' ||
         ||||||||||||<#DDDDDD><:> '''2015~2016 [[한국프로농구]] [[KBL 챔피언결정전|플레이오프 MVP]]''' ||
         ||<width=125><:> [[양동근(농구선수)|양동근]][br]([[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울산 모비스]]) ||<:> → ||<width=125><:> '''이승현[br]([[고양 오리온 오리온스|고양 오리온]])''' ||<:> → ||<width=125><:> [[오세근]][br]([[안양 KGC인삼공사|안양 KGC]]) ||
         ||||||||||||<#DDDDDD><:> '''2015~2016, 2016~2017 [[한국프로농구]] 최우수 수비상''' ||
         ||<width=125><:> [[양동근(농구선수)|양동근]][br]([[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울산 모비스]]) ||<:> → ||<width=125><:> '''이승현[br]([[고양 오리온 오리온스|고양 오리온]])''' ||<:> → ||<width=125><:> [[박찬희(농구)|박찬희]][br]([[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인천 전자랜드]]) ||
         ||||||||||||<#DDDDDD><:> '''2014~2015 [[한국프로농구]] [[KBL 최우수 신인|최우수 신인]]''' ||
         ||<width=125><:> [[김종규(농구)|김종규]][br]([[창원 LG 세이커스|창원 LG]]) ||<:> → ||<width=125><:> '''이승현[br]([[고양 오리온 오리온스|고양 오리온스]])''' ||<:> → ||<width=125><:> [[정성우]][br]([[창원 LG 세이커스|창원 LG]]) ||
         ||||||||||||<#DDDDDD><:> '''2017 [[농구대잔치]] MVP''' ||
         ||||||||||||<#DDDDDD><:> '''2015 [[프로-아마 농구 최강전]] MVP''' ||
         ||<width=125><:> [[이종현(농구선수)|이종현]][* 2013년 MVP. 2014년 대회는 [[2014 FIBA 농구 월드컵 스페인|FIBA 농구 월드컵]]과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인천 아시안 게임]] 때문에 개최되지 않았다.][br]([[고려대학교]]) ||<:> → ||<width=125><:> '''이승현[br]([[고양 오리온 오리온스|고양 오리온스]])''' ||<:> → ||<width=125><:> [[김시래]][br]([[국군체육부대|상 무]]) ||
         ||||||||||||<#DDDDDD><:> '''2014 [[한국대학농구리그]] 정규리그 MVP''' ||
         ||<width=125><:> [[김종규(농구)|김종규]][br]([[경희대학교]]) ||<:> → ||<width=125><:> '''이승현[br]([[고려대학교]])''' ||<:> → ||<width=125><:> [[문성곤]][br]([[고려대학교]]) ||
         ||||||||||||<#DDDDDD><:> '''2014 [[한국대학농구리그]] 챔피언결정전 MVP''' ||
         ||<width=125><:> [[이종현(농구선수)|이종현]][br]([[고려대학교]]) ||<:> → ||<width=125><:> '''이승현[br]([[고려대학교]])''' ||<:> → ||<width=125><:> [[강상재]][br]([[고려대학교]]) ||
         ||||||||||||<#DDDDDD><:> '''2014 [[MBC배 전국대학농구대회]] MVP''' ||
         ||<width=125><:> [[이종현(농구선수)|이종현]][br]([[고려대학교]]) ||<:> → ||<width=125><:> '''이승현[br]([[고려대학교]])''' ||<:> → ||<width=125><:> [[이동엽]][br]([[고려대학교]]) ||
         ||||||||||||<#DDDDDD><:> '''2011 [[한국대학농구리그]] 신인상''' ||
  • 윤덕주 (농구인) . . . . 42회 일치
         '''윤덕주'''(尹德珠,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이자, 대한체육협회 부회장,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구한말의 계몽 운동가 [[윤필오]]의 손녀이자,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윤홍열]]의 딸이다. 4,5대 국회의원과 재무부 차관, [[호남정유]]사장을 지낸 [[서정귀]]의 부인이다.
         [[1935년]] [[숙명여자고등학교]] 재학 중 농구 선수가 되어 해방 후, [[1950년대]]까지 농구 선수로 활동했다. 자녀를 임신한 상태에서도 현역 농구선수로 코트에서 활약하여 화제가 되었다.
         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 독립운동가 [[이상정]], 체육인 겸 사학자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은 친정어머니 이숙경의 사촌 남동생들이었다. 치과의사 겸 치의학자 [[이열희 (1924년)|이열희]]는 외사촌 동생이었다. 대구 출신.<ref name="dibigos">[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307032 <nowiki>[</nowiki>부고<nowiki>]</nowiki> 윤덕주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 동아일보 2005.07.09</ref>
         [[1935년]] [[숙명여고]] 시절 선수로 농구와 인연을 맺은 뒤 대한농구협회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등 각종 체육단체에서 활동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9&aid=0000449350 윤덕주 농구협명예회장 별세] 매일경제 2005.07.08</ref> 1935년 숙명여고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일제강점기 최고의 센터로 이름을 날렸으며 1940년대 초반 결혼 후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한 채로 코트에서 뛴 것은 유명한 일화가 되기도 했다.<ref name="dibigos"/>
         [[1945년]] 해방 이후에도 농구 선수로 활약하였고 [[서정귀]]와 결혼, 이후에도 임심 중에도 현역 농구선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대 은퇴 후엔 대한농구협회와 대한체육회에서 이사, 부회장 등을 두루 거치며 행정가로 활약했다.<ref name="dibigos"/>
         [[2005년]] 5월 부천에서 열린 2005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리그의 개회선언을 하는 등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했고 7일에도 지인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할 정도로 건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갑자기 찾아온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7081754171&code=100402 <nowiki>[</nowiki>부고<nowiki>]</nowiki> ‘여자농구의 대모’ 윤덕주씨 별세] 경향신문 2005.07.08</ref>
         빈소는 서울대병원 영안실 3층1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2일 오전6시에 거행되었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507/h2005070818102324180.htm 윤덕주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ref> 2005. 7. 12(화) 오전 6시 대한농구협회장(장례위원장, 이종걸)으로 거행되었으며 장지는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면]] 연화리 선영에 안장되었다.<ref>[http://www.jumpball.co.kr/cont/cont_view.php?cont_cd=02&cont_seq=2785 한국농구 대모 윤덕주 명예회장 별세]</ref>
         [[2007년]] [[3월 8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국제농구연맹(FIBA)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헌액되었다.<ref name="gibisos">[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65&article_id=0000010191 故 윤덕주 씨, 'FIBA 명예의 전당' 헌액]</ref> FIBA 농구 명예의 전당-공로자 부문에는 윤덕주 씨를 포함해 총 24명이 이름을 올렸고, 윤덕주 씨는 공로자 부문의 유일한 여성이다.<ref name="gibisos"/>
         * [[1935년]] 농구선수
         * [[1945년]] 해방 후에도 농구 선수로 활동
         * [[1952년]] 대한농구협회 이사
         *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 [[1986년]] 국제농구연맹 및 아시아농구연맹 중앙집행위원
         *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
         * KOC부위원장 겸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 어머니농구회 회장
         * [[1999년]] [[2월 11일]]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425319 대한농구협회, 최희암감독 사면 복권]</ref>
         * [[1999년]] [[4월 27일]] ~ [[1999년]] [[6월]] 제18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5월2-9일, 일본 시즈오카) 한국 선수단 단장<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570997 한국 여자농구대표팀 28일 결단식]</ref>
         * [[2005년]] [[5월 18일]] 2005 FIBA 여자농구 월드리그 행사 주관<ref>[http://www.jumpball.co.kr/cont/cont_view.php?cont_cd=03&cont_seq=1661 <nowiki>[</nowiki>월드리그<nowiki>]</nowiki> 한· 일전 이모저모]</ref>
         * [[2007년]] [[3월 8일]] 국제농구연맹(FIBA) 명예의 전당 헌정<ref name="gibisos"/>
  • 슈가(방탄소년단) . . . . 24회 일치
         ||<:><#00CED1>{{{#fff '''취미'''}}} ||<(> [[농구]], [[사진]] 찍기 ||
         예명은 Sugar(설탕)가 아니라 '''SUGA'''가 맞다. 이 예명을 가지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피부가 무척 하얀 데다 웃을 때[* 웃을 때 본인 특유의 입동굴을 보인다. 이 입동굴 때문에 팬들이 팬사인회에서 아랫니를 보여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예쁘고 달콤해서 슈가라는 예명을 지었다는 것. 하지만 힙합이 너무 달콤하면 안 된다는 소리에, 'SUGAR'에서 R이 없는 그냥 'SUGA'를 선택했다 한다. 힙합 용어에서 '슈가'는 '중독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학창 시절에 농구부에서 [[슈팅 가드]]를 맡았던 것에서 모티브를 따 줄임말인 '''슈가'''를 선택했다는 것. 모 인터뷰에서는 복싱이 터프하지만 정교한 기술이 필요해 'sweet science'로 불리는 것에서 영감을 얻어, 처음에는 스윗해 보이지만 음악적으로 시니컬한 면이 있어 이런 이중적인 면모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슈가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또한 믹스테이프인 'Agust D' 뮤직비디오를 볼 때, 소속사에서 공식적으로 올려 준 영어 자막을 틀고 보면 '성공'을 'sugar'라는 단어로 번역해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난 '''성공'''과 거리가 먼 형들 사이 눈엣가시네 -> I'm a pain in yo' ass too far from the '''sugar'''. 성공을 통해 맛볼 수 있는 달콤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예명의 본래 뜻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반해 본인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매번 예명의 뜻을 설명할 때마다 이유가 달라진다. 때문에 최근에는 뭐 이젠 그런 게 중요한가 싶기도 하고요... 하고 답하기도 하였다.
         믹스테이프 발매 이전에 라디오에서 슈가는 본래 자신이 연습생 시절 덩치가 가장 컸고 농구도 잘 하였기에 본인이 180cm까지 클 줄 알았으나 어깨를 다치면서 병원에서 운동을 삼가라 하였고, 그로 인해 근육이 빠지면서 키가 크지 않았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당시에 슈가는 어깨가 다친 이유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고 당시 분위기 또한 유머러스하게 진행되었을 뿐더러 어깨에 대해 심각하게 언급하지 않았기에 팬들은 당연스럽게 어깨가 다친 것이 어느 수준으로 다쳤는지, 어떻게 다쳤는지에 대해 알 겨를이 없었다. 그저 '어깨를 다친 적이 있었다'라고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 '''연습생 생활 당시 생활고 때문에 배달 알바를 하다가 사고로 어깨가 박살났다'''는 것은 이 곡으로 인해 처음 알게 된 것.
          * 고등학교 시절 농구부의 부원이었다. 농구로 대회에서 우승도 여러 번 하고, 연습생 때도 매주 일요일에는 농구를 했다고 한다. 포지션은 대개 [[포인트 가드]]나 [[슈팅 가드]]. 발이 빠르고 공격보단 수비를 잘한다고 한다. 다양한 프로그램에서 농구로 활약상을 펼치고, 농구공을 튕기는 일에 능한 모습으로 보아 아직도 농구 실력과 농구에 대한 애정은 여전한 듯하다. 슈가의 학창 시절 동창들은 슈가가 커서 농구선수가 될 줄 알았다고 한다. 무기력한 평소 모습과 농구할 때의 갭이 심해 팬들이 농구공 잡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2015년 9월 추석 특집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아육대]]에서 농구선수로 나갔다. 그리고 4골[* 2점 슛 3개, 자유투 1개.]을 기록했다. 최근 [[아는 형님]]에 나가서 농구공을 한 손가락으로 돌리기도 했다.
          * 농구를 좋아해서 [[https://www.youtube.com/watch?v=5nN8v3LJQrg|농구공 소리를 비트로 작곡한 곡]]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5liS0Ah_W8|화양연화 pt.1 앨범 리뷰(5분 35초)]]. 이 곡에서 본인의 자전적 얘기를 농구에 비유해서 썼다.[[http://www.melon.com/song/detail.htm?songId=5681152|#]]
          * 좋아하는 농구 선수는 前 [[NBA]] 선수이자 [[6성 슈가]] 중 한 명인 [[앨런 아이버슨]].
          * 빅히트 윤석준 이사에 따르면 멤버들과 화양연화라는 단어를 통해서 청춘을 표현하자는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합의가 되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게 슈가였다고 한다. "사실 그 나이 때의 슈가를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농구코트에서 홀로 농구공을 던지다 땀에 젖은 채로 앉아 있는 슈가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런 얘기를 슈가에게 전달하였더니 슈가도 실제 그런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하더라. 그 때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랩으로 만들어주면 그게 곧 청춘 그 자체일 거 같다고 얘기했고 아니나 다를까 너무나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왔다. 자신감과 불안감이 교차하는 젊음의 단면을 농구하는 소년을 통해 그려낸 우화라고 받아들여주면 될 거 같다. 내 입장에서 이 곡은 단순히 이번 음반만의 인트로가 아니라 화양연화 2부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그려낸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http://www.mbn.co.kr/pages/news/newsView.php?category=mbn00012&news_seq_no=2331260|인터뷰 전문]]
          * 농구부과 동시에 선도부 활동도 했었다. 선도부였으면서도 선생님한테 받을 수 있는 31가지 벌은 종류별로 다 받아봤다고 한다. ~~베스킨 라빈스 31 ㄷㄷㄷ~~
         ~~닭꼬치~~ [* [[비틀즈 코드]]에서 언급.] 까불다 그랬다고. 한강에서 농구하다가 친해진 분들 중에 서울대 법대생도 있다고 전해진다.
  • 최희암 . . . . 22회 일치
          | 직업 = 수필가 <br/> 스포츠 평론가 <br/> 기업가 <br/> 前 프로 농구 감독
         '''최희암'''(崔熙岩, [[1955년]] [[12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한국 프로 농구|농구 선수]]를 지낸 [[수필|수필가]] 겸 [[기업가]]이며 前 [[한국 프로 농구|KBL 한국 프로 농구]]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감독이다.
         그는 [[전라북도]] [[무주군|무주]] 출생이며 졸업을 거쳐 [[연세대학교]]를 학사 학위하고 실업 팀 [[전주 KCC 이지스|현대전자]]에서 선수로 뛰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에는 동기생인 [[박수교]], [[신선우]] 등에 가려 출장 기회를 많이 잡지 못했고 실업 농구에서도 빛을 보지 못해 선수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후 [[현대건설]]에 취업하여 [[이라크]]에서 근무하였고, 귀국 후 [[현대건설]]에서 퇴사하여 에서 체육 교사로 임용되었으나 곧 사임하였고 [[1986년]]부터 [[연세대학교]] 남자 농구단 감독을 맡으며 지도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는 선수들의 역할을 철저하게 분업화하고, 외곽슈터 중심의 농구를 통해 연세대학교를 강호로 만들었다. 실업팀과 대학팀을 망라한 [[농구대잔치]]에서 세 차례 우승했고, 특히 [[1993년]]-[[1994년]] 농구 시즌 우승은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우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연세대 감독으로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2002년]]부터 프로 농구 [[울산 모비스 피버스]]의 감독을 맡았다가 두 번째 시즌에 성적 부진으로 도중 하차한 뒤, [[2005년]] [[동국대학교]] 농구부 감독을 거쳐 [[2006년]]부터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감독으로 프로에 복귀한 후, [[2008~2009]]시즌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으나,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팀을 떠났다.
         최근에는 대학 농구 감독과 프로 농구 감독 시절 활약담을 수필집으로 집필하여 발표하였고 기업인으로도 변신하면서 전자랜드의 계열사인 고려용접봉 중국법인 지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고려용접봉 중국법인 지사 기업을 대한민국 법인 기업으로써 인수하여 2014년 현재 접봉 부회장으로 재직중이다.
         * [[2001년]] [[문화방송|MBC 문화방송]] 스포츠 프로 농구 객원해설위원
         |후임자 = [[장일 (농구인)|장일]](대행)
         |전임자 = [[이호근 (농구인)|이호근]](대행)
         {{토막글|농구인|작가}}
         [[분류:195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전주 최씨]][[분류:무주군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농구 선수]][[분류:연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동문]][[분류:아메리칸 대학교 동문]][[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캐나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동국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농구 해설가]][[분류:대한민국의 농구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안영준 . . . . 16회 일치
         [include(틀:상위 문서2, top1=농구 관련 인물(한국), top2=동명이인/ㅎ)]
         ||<#e1002a><:> '''[[2017~2018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FFFFFF 2018}}}]]''' ||
         ||||||||||||<tablealign=center> '''2017~2018 [[한국프로농구]] [[KBL 최우수 신인|최우수 신인]]''' ||
         |||||||||| '''2018 KBA [[3X3 농구|3X3]] 코리아투어 최강전(FINAL) 통합 오픈부 MVP''' ||
         [[대한민국]]의 [[농구]][[선수]].
         2017년 11월 13일 전자랜드와의 [[한국프로농구 D리그|D리그]] 경기에서는 비록 팀은 패했지만 26득점으로 맹활약을 했다.
         드래프티 동기인 허훈과 양홍석도 소속팀 kt에서 활약 중이고 안영준은 팀 성적에서, 허훈은 개인 성적에서 상대방보다 앞서 있었기에 신인왕에 어느 선수가 적합한지 여러 의견이 오가는 중 뜬금없이 3월 9일 [[유재학]] 감독이 기자들의 신인왕 관련 질문에“자질만 놓고 보면 양홍석이 안영준보다 훨씬 낫다”, “양홍석은 국가대표가 될 수 있지만, 안영준은 지금처럼 하면 국가대표에 뽑히기 힘들다. 가지고 있는 기본 자질이 다르다”라고 평가한 보도가 나왔다. [[http://www.basket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178063|기사]] 유재학 감독이 국가대표 선발 주무 부처라고 할 수 있는 농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선수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순 있겠지만 동시에 4강 플레이오프 직행을 두고 경쟁하던 팀의 감독이니만큼 언론에 대고 한 본 발언이 적절한지에 대해선 설왕설래가 있었다.
         ||<:><#0A6EFF> {{{#ffffff '''국제대회 경력''' }}} ||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2018)[* 3X3 농구] [br] 2019 농구 월드컵 중국 아시아 예선 2라운드 1윈도우 (2018) ||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3X3 농구]] 종목에 출전하기 위해 [[김낙현]], [[박인태]], [[양홍석]]과 'KBL 윈즈'팀을 결성하여 3X3 코리아 투어 선발전에 참가했다. 2018 KBA 3x3 코리아투어 최강전에서 'KBL 윈즈'가 우승했고 안영준은 MVP를 받았다.
         농구 월드컵 아시아 예선 2라운드 1차전에서 15분 출장하며
         키는 3번으로서 평범하지만 202cm의 윙스팬은 키에 비해 길고 웨이트와 운동 능력이 좋은 편이다.[* 신인시절 무려 [[김종규(농구)|김종규]]에게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시도했지만 공이 림 안쪽을 맞고 튀어나갔다.]
          * [[서울 SK 나이츠]]에서 지명을 한다면 1년 선배인 [[최준용(농구선수)|최준용]]과 만날 가능성이 높다. [[서울 SK 나이츠]] 감독인 [[문경은]]이 "[[허훈]], [[양홍석(농구선수)|양홍석]], [[유현준(농구선수)|유현준]]은 어차피 앞에서 뽑힐 것이고, 우리 순번에서는 [[안영준]]과 [[김국찬]]이 남아있을 것 같은데 우리 팀에는 [[김국찬]]보다 [[안영준]]이 더 어울린다"고 애기하였다. 왜냐하면 슈가를 뽑아봤자 변기훈과 화이트와 롤이 겹치는데다, SK의 백업 포워드가 [[김우겸]], [[함준후]] 정도라는 걸 감안한다면 포워드인 안영준을 뽑는 것이 선수풀의 유지를 위해서는 더 좋다는 시각. 그리고 이 예상처럼 문경은 감독은 안영준을 뽑았고, 김국찬은 다음 순위로 KCC로 갔다.
         [[분류:동명이인]][[분류:1995년 출생]][[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농구 선수]][[분류:스몰 포워드]]
  • 이상백 (1904년) . . . . 16회 일치
         | 직업 = [[역사학|사학자]] <br/> [[사회학|사회학자]] <br/> [[철학|철학자]] <br /> [[농구]] 선수 <br /> 체육인 <br/> 체육이론가 <br /> 체육행정가 <br /> 여행가 <br /> 기행 작가 <br /> [[수필|수필가]] <br /> [[저술가]] <br /> 스포츠 평론가
         사학자로도 활동하였고 각종 사회단체와 문교부 고시출제위원, 중앙공무원교육원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 중반의 농구선수였으며 각종 올림픽 대회의 선수단 대표와 대표단장을 역임하였다. 학회 활동으로는 [[진단학회]], [[연경학회]], [[대한민국 학술원]]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일본의 [[일본 대학농구연맹]]을 결성하고 [[와세다 대학]] 농구팀 대표로 [[일본 대학농구연맹]]에 참여하였으며, 일본 대학농구연맹 농구부 주장으로 [[미국]]에 원정 경기에 출전하여 여러 번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밖에 축구, 야구에도 주전 선수로 실력을 보여주었다. [[1927년]]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모교인 [[와세다 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이후 [[1930년]]에 [[일본농구협회]]를 창설하여 창립회원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에 선임되었다. [[1931년]]에 일본체육회 상무이사를, [[1935년]]에 일본체육회 전무이사를 맡았다. 그는 일찍부터 유명한 농구선수로 활약하였으며, 일제 강점기 당시의 체육계 경력이 인정되어 만년에는 체육 이론가와 행정가로서 활동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 문화사 연구 논고》, 《이조 건국의 연구》 등이 있다. 사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그의 이름을 딴 이상백배 한-일 대학선발농구대회가 개최되고 있고, 아시안게임 최우수선수에게는 이상백배(杯)가 특별 수여되고 있다.
         *《지도 농구의 이론과 실제》
         **** 5촌 조카딸 : [[윤덕주 (농구인)|윤덕주]](尹德珠,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ref>[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48641.html 윤덕주 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 한겨레신문 2005.07.08</ref>), 농구선수, [[대한체육회]] 부회장·명예회장 역임
         [[분류:1904년 태어남]][[분류:1966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역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농구 선수]][[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수필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건국동맹]][[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한국독립당]][[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인]][[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역사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학자]][[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
  • 추일승 . . . . 15회 일치
         {{농구 선수 정보
         | 소속팀1 = {{국기그림|대한민국}} [[울산 모비스 피버스|기아자동차 농구단]]
         | 코치팀1 = {{국기그림|대한민국}} [[신협 상무 농구단|상무 농구단]]
         | 코치팀2 = {{국기그림|대한민국}} [[신협 상무 농구단|상무 농구단]](감독)
         '''추일승'''([[1963년]] [[1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이자 현재 [[한국프로농구|KBL]]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의 감독이다.현 [[한국프로농구|KBL]] 10개 구단가운데 최고령감독이기도 하다.
         |전임자 = [[이상윤 (농구인)|이상윤]]
         |전임자 = [[김남기 (농구인)|김남기]]
         {{한국 프로 농구 감독}}
         {{토막글|농구인}}
         [[분류:196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동문]][[분류:홍익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농구 감독]][[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농구 선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추계 추씨]]
  • 박인태 . . . . 7회 일치
         {{농구 선수 정보
         * 2013년 제11회 FIBA U19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 2012년 제22회 FIBA 아시아 U-18 남자농구선수권대회 청소년대표
         * 2012년 제2회 FIBA U17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 2011년 제2회 FIBA 아시아 U-16 남자농구선수권대회 청소년대표
         {{토막글|농구인}}
         [[분류:199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농구 선수]][[분류:대구해서초등학교 동문]][[분류:계성중학교 동문]][[분류:계성고등학교 (대구)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동문]]
  • 강상재 . . . . 6회 일치
         {{농구 선수 정보
         * 2016년 제 39회 이상백배 한*일 대학선발농구대회 국가대표
         * 2013년 제11회 FIBA U19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 2012년 제22회 FIBA 아시아 U-18 남자농구선수권대회 청소년대표
         {{토막글|농구인}}
         [[분류:199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구칠곡초등학교 동문]][[분류: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농구 선수]][[분류: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
  • 임효성 . . . . 6회 일치
         [[분류:충주시 출신 인물]][[분류:농구 선수]][[분류:1981년 출생]]
         [include(틀:상위 문서, top1=농구 관련 인물(한국))]
         前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소속의 농구선수. 포지션은 가드.
         그리고 그 시즌 종료 후 다시 [[신선우]] 감독의 유명한 시간차 트레이드의 일원이 되어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하며 ~~이적 돌림빵~~ 저니맨 취급을 받다가 06-07시즌 종료 후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했다. 전역 후 다시 [[한정원]]과 맞트레이드 되면서 전자랜드로 컴백. 전자랜드에서도 역할은 주로 백업 가드다. 그것도 [[강혁(농구)|강혁]]이 팀에 합류하고, [[정병국(농구선수)|정병국]]이 제대하면서 제 4의 가드. 2012-2013시즌 도중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실상 은퇴했고 시즌 종료 후 공식적으로 은퇴함으로써 조용히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이 --벤치워머-- 농구선수로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선수가 조명을 받은 이유는 '''바로 [[S.E.S]] 멤버였던 [[유진(배우)]]의 남자친구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 정상헌 . . . . 5회 일치
         {{농구선수 정보
         '''정상헌''' (鄭尙獻, [[1982년]] [[5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이다.
         [[2013년]] [[6월 26일]] 자신을 무시하는 처형을 목졸라 살해한 후 3일 뒤인 [[6월 28일]] 밤 10시 사체를 인근 야산에 암매장 해 살인 및 사체를 유기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징역 20년을 선고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2&aid=0000544709 '처형 살해' 전 프로농구 선수 징역 20년 확정]</ref>
         {{토막글|농구인}}
         [[분류:198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농구 선수]][[분류:경복고등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살인자]][[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
  • 최승욱 . . . . 5회 일치
         {{농구 선수 정보
         |리그 = [[한국 프로 농구|KBL]]
         '''최승욱'''(1994년 4월 15일~ )은 [[대한민국]]의 농구선수이며 포지션은 포워드이다.
         {{토막글|농구인}}
         [[분류:1994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농구 선수]][[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계성고등학교 (대구) 동문]][[분류:경희대학교 동문]][[분류:계성중학교 동문]][[분류:대구해서초등학교 동문]]
  • 한선교 . . . . 5회 일치
          | 경력 = [[문화방송]] 아나운서<br>[[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제19대]] 전반기 [[대한민국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장]]<br/> 제7대 [[한국농구연맹]] 총재<br/>자유한국당 사무총장
         1984년부터 [[문화방송]]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다가 1995년부터 프리랜서가 되었다. 2004년 [[한나라당]] 대변인이 되었고,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의 국회의원|용인시 병]]에 출마하여 제[[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17]]·[[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18]]·[[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19]]·[[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20]]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11년 제7대 [[한국농구연맹]] 총재에 선출되었다.<ref>박세운.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9&aid=0002256700 KBL 신임 총재에 한선교 "스킨십 소통으로 프로농구 살리겠다"]{{깨진 링크|url=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9&aid=0002256700 }}. 노컷뉴스. 2011년 6월 3일.</ref>
         * 2011년 9월 ~ 2014년 6월: [[한국농구연맹]] 총재
         [[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문화방송의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아나운서]][[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동문]][[분류:자유한국당 당원]][[분류:동성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195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청주 한씨]][[분류:친박]][[분류:농구 행정가]]
  • 이성희(배구감독) . . . . 4회 일치
         2014-2015 시즌은... '''말 그대로 2012-13 시즌의 재림'''. 뚜렷한 전력보강도 전무했고[* 다른 팀들이 FA 영입, 보상선수 이적 등으로 정신없이 오프 시즌을 보낸 반면 KGC는 조용한 것도 모자라 은퇴했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인 김세영이 [[한유미]]와 같이 [[수원 현대건설|현대건설]]로 이적하고,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겨우 1명([[문명화]])만 지명하는데에 그쳤다. [[안양 KGC인삼공사|농구단]]과 마찬가지로 KGC 고위층의 투자 의지가 줄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얘기까지 공공연히 떠돌 정도. --농구단은 [[양희종|누구]]한테 [[화폐|돈]]이라도 썼지...--], [[백목화]]와 [[이연주(배구)|이연주]]의 기량 하락, 조이스만 바라보는 팀 공격진, 도로공사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했던 센터 [[이보람]]의 시즌 중 [[임의탈퇴]] 공시까지 겹치며 --늘어나는 [[흰머리]]처럼--[* 실제로 인삼공사 감독 부임 당시만 해도 흰 머리였으나, 2016년 1월 9일, 검게 [[염색]]을 하고 나타났다.] 패만 줄창 쌓이면서 8승 22패를 기록했다. [[GS칼텍스 서울 KIXX|GS칼텍스]]와 동률을 이루었으나, 승점에서 2점 모자라 최하위에 그쳤다.
         여자농구에서도 쌍벽을 이루는 [[정인교(농구)|무능 감독]]이 등장했지만, 결국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물러났다.
  • 정영삼 . . . . 4회 일치
         {{농구선수 정보
         '''정영삼'''([[1984년]] [[4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로, 현재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소속이다.
         {{토막글|농구인}}
         [[분류:198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농구 선수]][[분류:계성중학교 동문]][[분류:대구대성초등학교 동문]][[분류:계성고등학교 (대구) 동문]][[분류:건국대학교 동문]]
  • 하이큐!! . . . . 4회 일치
          * 작가인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성별이 불분명하다. 심지어는 후루다테 작가가 졸업한 도쿄 디자인 전문학교에 졸업 후 찾아왔었다는 포스팅이 어떤 블로그에 올라왔는데, 댓글에서 어떤 팬이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성별을 묻자 '작가님이 직접 공개하지 않으신 사생활은 공개할 수 없습니다' 라고 철통방어(...)를 하기도 했다. 종합 1000만 부 이상 팔린 만화책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으로도, 온라인으로도, 심지어는 인터뷰조차도 그의 활동은 적어 필명이 본명인지, 나이가 얼마인지, 성별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작품들이 [이와테]현 및 [미야기]현을 작중 배경으로 하고 있고 작가 본인도 인터뷰에서 그렇게 밝혔으므로 출신지가 그 쪽인 것은 분명하다. 작가가 여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팀메이트 간의 감정 묘사, 이름 및 생일의 의미와 관련성까지도 계산한 ~~설정덕후의~~ 섬세함, 특유의 동글동글한 그림체를 근거로 내세워 여자 작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반면 작가가 남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wiki:"니시노야 유" 니시노야]와 [wiki:"타나카 류노스케" 타나카]의 [wiki:"시미즈 키요코" 시미즈] 빠질을 저렇게 완벽하게(...)그려내는 것은 남자밖에 하지 못한다.', '[쿠로코의 농구]도 남자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잘 그려내고 있다' 등을 근거로 남자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점치고 있다.
         2015년 2월 기준 13권까지 강동욱의 번역에 의해 정발되었는데, 그 사이에서 원어판과 비교해 오역이 많이 드러나 팬들 사이에서는 일어가 가능하다면 원서를 사서 보라고 할 만큼 퀄리티가 좋지 않다는 평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11권 신젠 고교에서의 합숙 줄거리 중 보쿠토와 쿠로오보다 한 살 어린 아카아시가 뜬금없이 반말을 하거나, 오이카와의 그 유명한 '이와짱은 우리 엄마에요?'[* 원어로는 「岩ちゃんは俺のお母ちゃんですか?」.] 대사는 '''네가 내 엄마라도 되냐?'''라는 대사로 바뀌어 오이카와에게 일진카와(...)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게다가 대화에서 자주 쓰여진다고 보기 어려운 '~예요' 체가 남발되는 경향이 있고, 당당하고 맹한 느낌을 주는 '[~슴다체]'가 번역되지 않고 나오기도 한다. 일단 번역이 등장인물의 성격을 너무도 다르게 표현하는 게 큰 문제. ('''츠키시마: 짜식 멋있는데.''') 당장 몇 년만 지나도 어색할 유행어 집어넣는것은 덤. (시합중의 멘탈은 '''갑 오브 갑'''이지만.) 번역가가 글자를 못 읽는 경우도. ('''네코마 농구부''' ~~쿠로오의 농구?~~ '''호쿠토. 아카아시 케이시''') 더 많은 오역 사례가 있으면 [추가바람].
  • 하이큐/229화 . . . . 4회 일치
          * 사와무라는 부리나케 체육관으로 달린다. 가면서 휴대폰으로 스가와라 코시나 아즈마네 아사히에게 연락하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연락처가 사라져 있다. 체육관에 도착해 보니 체육관은 농구부가 쓰고 있는데 어째서 농구를 하고 있냐고 하니까 "여기는 이제 농구부 것"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괴이함을 느낀 사와무라가 다른 배구부 부원들은 어디로 갔냐고 물었더니 "배구부는 너 한 명이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 귀갓길에 다른 3학년들과 떨어진 사와무라는 여전히 꿈 때문에 찜찜한 기분이 든다. 가던 길에 잠시 체육관에 들러보는데 왠지 부원들이 체육관에 와있다. 히나타는 참배갔다 오는 길에 그냥 들렀고 왠지 카게야마는 런닝 중이었는데 어쩌다 들렀다고 한다. 타나카는 누나의 주정을 참다 못해 도주, 니시노야는 "강자를 찾아서"라는 해괴한 이유. 사와무라는 "참치도 아니고 움직이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냐"고 핀잔하며 쉬는 날엔 푹 쉬고 괜히 돌아다니다 감기나 들지 말라며 쫓아낸다. 그런데 사실 사와무라도 "체육관을 농구부한테 뺏기지 않았나 확인"하러 왔으니 엉뚱하게 돌아다니긴 마찬가지다.
  • 강원도 . . . . 3회 일치
         2016년 현재 강원도 내 지방자치단체를 연고지로 삼고 있는 스포츠 팀으로는 [[K리그]]의 [[강원 FC]][* 메인 연고지는 [[강릉시]]이며 가끔 [[춘천시|춘천]]과 [[원주종합운동장|원주]]는 물론 [[알펜시아 리조트|평창]]에서도 홈경기를 치른다.]와 [[한국프로농구]]의 [[원주 DB 프로미]] 등이 있다. [[KBO 리그]]의 경우 과거 [[삼청태현|인천광역시를 제1연고지로 삼았던 팀들]]의 광역연고권에 강원도가 포함된 적이 있고 [[수원 케이티 위즈 파크|수원야구장]]이 세워지기 전인 1980년대 초·중반에는 [[삼청태현|삼미, 청보, 태평양]]의 홈경기가 춘천야구장에서 분산 개최된 적도 있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1982년 창단 이후 처음으로 치른 공식 홈경기 장소도 [[숭의야구장|인천]]이 아닌 춘천이다. 물론 이 때는 [[숭의야구장]]이 공사 중이어서 춘천에서 경기를 연 것이다. 이 때 야구 경기가 열렸던 춘천야구장은 철거되었고 [[의암 야구장]]이 그 대체 성격으로 완공되었다.] 현재는 [[한화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각각 영서지역 고등학교(강원고, 원주고)와 영동지역 고등학교(설악고, 강릉고)들을 대상으로 신인 1차 지명권을 갖고 있지만 홈경기 개최 권한과 신인 지명권 관할 지역은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다. [[WKBL]]에서는 [[아산 우리은행 위비|우리은행 농구단]]이 오랫동안 춘천 연고팀으로 있었지만 2016~2017 시즌부터 돌연 [[아산시]]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강원도 연고의 농구팀은 [[원주 DB 프로미]]만이 남게 됐다.
  • 권성욱 . . . . 3회 일치
         '''권성욱'''([[1970년]] [[1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케이블 방송국 [[KBS N 스포츠]]의 [[스포츠캐스터]]이자 현 KBS N 편성국장으로 [[야구]]중계를 격주 1회정도로 겸하고 있으며, [[농구]]중계도 담당했었다.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1998년]] [[2월]]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의 지역방송국인 PSB 부산방송(현재 [[KNN]])으로 입사하여 아나운서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주로 프로야구 중계를 많이 담당하였다. [[2001년]]부터는 스포츠 전문 케이블방송인 [[KBS N 스포츠]]로 소속을 옮겨 [[2013년]]까지 [[KBO 리그]], [[KBL 리그]] 농구 중계를 담당하였다. [[2011년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2011 대구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때는 일부 필드경기 및 시상식 장내해설을 맡은 바 있다. [[2014년]] 팀장으로 승진하면서 마이크를 내려놓았는데, 2015년 5월 2일과 10월 21일 2경기 마이크를 잡았으며, 2016년 4월 1일, [[KT 위즈]]와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 [[한국 프로농구]]
  • 날조트랩 -NTR- . . . . 3회 일치
         중1때 [[농구부]]에 들어갔다. 이 때 호타루가 남자 선배의 고백을 받고 사귀게 되자 질투심을 느끼게 된다. 타케다와는 농구 연습을 함께 하며 친해졌다.
         어릴 때 남자들에게 자주 울려졌다. 과거부터 유마 이외의 사람과는 친구가 되지 않아서 주변에서는 고립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유마가 농구부에 들어가면서 함께 보내지 못하는 일이 많아지자, 빈정거리는 듯이 3학년 선배 남자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사귀게 된 적이 있다. 중1때 남자친구를 만들었고, 이후로도 자주 남자친구를 갈아치워서 주변에서는 [[빗치]]로 여겨지고 있다.
  • 박명수(MC) . . . . 3회 일치
          * 전 농구인이자 범죄자 - [[박명수(농구)]]
         [[정준하]]와 함께 [[MBC]] [[로고송]]을 불렀다. [[http://www.youtube.com/watch?v=-EKJ21NZZLY&feature=related|MBC 로고송 하와수 버전]].~~근데 14초 분량에 정준하 목소리는 2초 정도 나온다 여기서까지 병풍~~ 여자 프로농구팀 [[춘천 우리은행 한새]]의 감독 --박명수--가 여자 선수를 성추행했다가 잡혀가는 일이 있었다. 사건 당시 '''--박명수-- 구속'''이라는 검색어가 인기 검색어로 올랐으며, 이 당시 코미디언 박명수는 본인이 진행하던 라디오에서 '''"저 멀쩡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자 운동팀의 남자 감독·코치가 선수들을 상대로 성희롱·성상납·성폭행 등을 벌인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크게 공론화된 적이 없었던 찰나, 마침 유명 연예인과 감독 이름이 동일한 덕에 이 일을 기점으로 이 관습이 공론화되나 했더니... 위자료 5400만원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http://www.lawtimes.co.kr/LawNews/News/NewsContents.aspx?serial=43435|#관련기사]].
  • 박철우(배구) . . . . 3회 일치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에서 2004년 데뷔해 2010년 삼성화재로 FA 이적을 했는데 그 배경에 전 [[부천 KEB하나은행|신세계 쿨캣]]의 [[농구]] 선수 [[신혜인]][* 이 열애설이 더 유명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신혜인]]의 아버지가 삼성화재의 감독인 [[신치용]]'''이기 때문이었다.(어머니는 농구선수 전미애) 그래서 그가 현대캐피탈 소속이던 시절에 많은 이들이 이들의 연인 사이를 배구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비유하기도 했으며, 배갤에서의 별명이 무려 '''사위'''(...)다. 그리고 박철우가 삼성전에서 유난히 부진한 것을 보며, 장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런다고 많이들 깠었다. 박철우가 FA로 이적하면서 사위와 장인이 한 팀으로 뭉쳤다.]과 연인 관계였던 것이 드러나서 유명하다.
         [[2011년]] [[9월 3일]], [[신치용]] 감독의 딸로 알려진 신혜인[* 前 여자농구 선수였다.]과 결혼하게 됐다. 스포츠 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해피엔딩으로 결말졌다. ~~하지만 시즌 중에는 [[신치용|장인어른]]한테 주구장창 깨지겠지.~~ 그런데 [[신치용]] 감독에게 [[홍길동|장인을 장인이라 부르지 못하고 감독님이라 부르는]] [[안습]]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적어도 박철우가 은퇴하기 전까지 아니면 신치용이 삼성 감독을 그만둘 때까지는... 그런데 그렇게 된 건 신치용 감독이 박철우에게 장인이라 부르지 못하게 해서 그런다고. 사실 이건 [[신치용]] 감독이 잘 한 것이다. 사석에서야 장인-사위지만, 선수단에서 있을 때는 공적인 자리인만큼 되도록이면 서로의 지위에 맞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비슷한 예로, 최고참급 현역선수가 코치보다도 나이가 많으면 코치를 존중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예. [[김병지]], [[박찬호]])]
  • 실업팀 . . . . 3회 일치
         [[야구]], [[축구]], [[농구]], [[배구]]에서는 [[프로 스포츠]]화가 진행되기 전 까지 기업 실업팀 실업리그가 '최상위 리그'로서 명성을 누렸다. 야구와 축구는 1980년대 프로가 출범하기 전 까지, 농구와 배구는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프로가 시작되기 이전까지가 실업리그의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종목에서 프로 리그 출범 이후로 많은 실업팀 선수가 프로선수로 전환했다. 축구의 경우는 [[중공업]], [[조선]], [[석유화학]] 등 제조업 팀이 많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한국축구를 이끌어 나간 중심은 금융팀이 금융단 축구를 박정희의 비호 아래 육성하면서 본격적인 세미프로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야구는 한 때 실업리그가 존폐 상태에 놓일 정도로 쇠퇴했으나 2010년대에는 [[프로야구]] 붐을 타고 아마추어 야구단이 새롭게 설립되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농구, 배구는 실업팀이 고사 위기에 놓인 상태이다.
  • 윤태진(아나운서) . . . . 3회 일치
         입사 초기에 [[농구]]와 [[배구]] 현장 쪽에서 인터뷰를 통해 경험을 쌓았다. 야구 시즌이 아닌 겨울에 주로 하는 실내 스포츠인 농구와 배구 등에서 현장 인터뷰를 자주 했다. 축구팬들은 야구로 '외도'했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은 다양한 스포츠를 접하고 싶었고, [[한국방송공사|KBS]]가 워낙 야구의 비중이 높은 채널이기도 하다. [[축구]] 쪽에서는 [[유로 2012]]에서 [[정인영(방송인)|정인영]]과 함께 유로 여신으로 칭송받기까지 했다. 본인은 그저 '''유로 여자'''이고, 유로 폐인이라고(...). 서로 공부하고 같이 시험까지 보면서 열의를 불태웠다.
          * 입사 전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2290979|윤태진(농구팬)]]으로 스포츠 뉴스에 나온 적이 있다(...).
  • 이열희 (1924년) . . . . 3회 일치
         *** 고종사촌누나 : [[윤덕주 (농구인)|윤덕주]](尹德珠, [[1921년]] [[6월 23일]] - [[2005년]] [[7월 8일]]<ref>[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48641.html 윤덕주 농구협회 명예회장 별세] 한겨레신문 2005.07.08</ref>), 농구선수, [[대한체육회]] 부회장·명예회장 역임
  • 최란(배우) . . . . 3회 일치
         [[김가연]]과 더불어 연예계 고소의 끝판왕으로 유명하다. 전 농구선수 [[이충희]]의 아내이기도 하기에 이충희에 대한 악플이 달리는걸 늘 모니터링 한다고 하고 변호사 자문도 구한다고 한다. 실제 [[디시인사이드]] [[농구 갤러리]]에서는 이 명성이 워낙 높아 최란이라면 벌벌 떨 정도다. 더불어 경중 안따지고 절대로 봐주지 않는다고 한다.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의 전신인 대구 오리온스 감독을 하던 이충희 전 감독에 대해 공홈에서 당시 오리온스의 엄청난 부진에 악플러들이 많았는데 며칠만에 최란에게 전원 고소당해서 처벌받은 실사례도 있었다. [[원주 DB 프로미]]의 전신인 원주 동부 프로미 공홈에서도 실명임에도 성적 부진에 성난 팬들이 이충희에 대한 악플을 남기다가 고소당한 사람들이 나왔고 이후 농구팬들은 최란이라면 벌벌 떨 수준이 되었다.(...)
  • 캡콤 스포츠 클럽 . . . . 3회 일치
         스포츠 클럽이라는 이름그대로 3가지 종목의 스포츠 게임 모음집으로 되어있다. 마치 [[3 원더스]]를 보는듯한 구성으로 [[농구]], [[축구]], [[테니스]]의 3가지.
         세가지의 게임 다 룰을 간략화 시키고, 조작도 단순하게 만들어서 머리 식히고 즐기기에는 최적이다. 다만 테니스의 경우에는 축구, 농구와는 달리 난이도가 죽여준다. 그런데 스포츠 게임이 잼병인 플레이어라면 답이 없다.(...) 세가지 종목을 전부 클리어하면 엔딩이 나온다.
         또한 [[타임릴리즈]] 방식을 채용해[*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타임릴리즈가 아니다. 코인이 1997개 들어가면 해금되는 방식. 성공하면 타이틀 화면에 멜로디와 강아지가 등장한다.] 나중에 보스[* 스타(축구), 골든 USA(농구), 멜로디(테니스).]들도 선택이 가능해진다. 보스들의 성능은 그야말로 최강.
  • 김연경(배구선수) . . . . 2회 일치
         2005-06시즌 신인왕 수상. 그것도 모자라 정규 리그 MVP, 챔피언 결정전 MVP까지 모두 싹쓸이하는 괴력을 보였다.[* 한국 프로스포츠에서 신인왕-정규시즌 MVP 동시 수상은 김연경 포함, KBL 2001-02 시즌의 [[김승현(농구선수)|김승현]]과 프로야구 2006 시즌의 [[류현진]]이 있다. 그런데 둘 다 KBL 파이널/한국시리즈 MVP는 수상하지 못했다. 김승현은 2001-02 시즌 파이널에서 맹활약했긴 했지만 MVP는 [[마르커스 힉스]]가 탔다. 류현진은 [[2006년 한국시리즈|팀이 삼성에게 패퇴]]하며 코시 MVP는 커녕 우승도 하지 못했다. 신인왕-한국시리즈 MVP는 프로야구 2005 시즌의 [[오승환]]이 있으나 이 해 정규시즌 MVP는 [[롯데 자이언츠]] [[손민한]]이 수상했다. 따라서 신인왕-정규시즌 MVP-파이널 MVP를 데뷔 시즌에 모두 쓸어간 사례는 김연경이 유일하다.] 덤으로 서브상, 득점상, 공격상, 보너스로 트리플 크라운 1회 달성하였다. [* 데뷔시즌 6관왕]
         그리고 종료 후 아제르바이잔 리그, 중국 리그 등 타국 리그의 팀에서 연 20억을[* 세계배구계에서는 사실상 최고 연봉 금액이다. 야구, 축구, 농구 등 리그 풀이 큰 리그의 고액연봉자에 비해서는 분명 많은 편은 아니지만. 참고로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의 [[로베르틀란디 시몬 아티스|로베르틀란디 시몬]]의 연봉이 이 정도다.]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구애 속에서도 거취 문제 당시 도와줬던 것을 잊지 않고 페네르바흐체와 2년 재계약에 합의했다.[[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8&aid=0002300250|관련 기사 1]][[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366&aid=0000247757|관련 기사 2]]
  • 김원주(가수) . . . . 2회 일치
         || '''취미''' ||<(> [[농구]] ,[[축구]], [[웨이크보드]], [[영화]]감상, [[음악]]감상, [[작사#s-2|작사]] ||
         || '''특기''' ||<(> [[농구]], [[축구]], [[웨이크보드]] ||
  • 우규민 . . . . 2회 일치
          * 배우 [[윤은혜]]와 초등학교 동창이다. 예전에 윤은혜가 모 프로그램에서 초등학교 4학년 2반 반장을 찾는 걸 보며 동창인 걸 알았다고 한다. 우규민 본인은 1학기 반장이었는데 찾지 않아 섭섭했다고 한다(…). 우규민이 2학기 때 야구부로 유명한 성동초등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스포츠 신문의 꼭지에서 윤은혜에게 보내는 편지[* 어느 한 선수가 편지를 쓰면 답장이 오는 꼭지였다. 이를테면 [[이범호]]가 절친인 농구선수 [[양동근(농구선수)|양동근]]에게 편지를 쓴다든지, [[이택근]]이 한 팀에 같이 있었던 [[박진만]]에게 편지를 쓴다든지. --근데 저들이 쓴 편지도 은근 안습한 내용들이 있었다.--]를 썼으나.... ~~아… 눈물 좀 닦고…~~ 그 스포츠 신문 꼭지에서 우규민이 유일하게 답장을 못 받았다.
  • 이동찬(기업인) . . . . 2회 일치
         스포츠에도 관심이 있었던지 1971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실업농구연맹 회장, 1980년부터 1983년까지 [[대한농구협회]] 회장, 1985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골프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 인천광역시/인물 . . . . 2회 일치
         * [[김승현(농구선수)|김승현]] - 부평구
         * [[김윤태(농구선수)|김윤태]] - 부평구
  • 창원시/인물 . . . . 2회 일치
         * [[김광철(농구선수)|김광철]] - 마산회원구
         * [[김기윤(농구선수)|김기윤]] - 마산회원구
  • 하이큐!!/등장인물 . . . . 2회 일치
         남자 배구부와 다른 체육관을 사용한다. 제 1체육관을 농구부와 코트를 반으로 나누어 쓰고 있는 중.
          농구부지만 히나타의 부탁으로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배구 시합에 출전한다.
  • 현동완 . . . . 2회 일치
         서울 출신. 1917년 조선중앙[[YMCA]] 학관을 졸업했고, 1918년부터 YMCA 간사가 되어 소년부와 체육부 간사, YMCA 연맹 주임간사, 영창학교(英彰․Y학관) 교장, 그리고 서울 YMCA 총무를 지내는 등 거의 전 생애를 YMCA와 더불어 산 YMCA맨이다. [[1920년]] [[3월 30일]] 현동완은 농구 선수 겸 감독원으로서 반하트와 함께 일본 도쿄 원정을 떠났다. YMCA 농구팀은 최초의 해외 원정 경기에서 2승 3패의 전적을 남겼다. 1938년 일제의 탄압으로 YMCA가 폐쇄 상태에 있었던 시기나 8.15 해방 후의 혼란기, [[한국전쟁]]으로 인한 회관 상실, 부산 피난과 환도 이후의 혼란기에 YMCA를 지키기 위해 힘썼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전쟁 고아와 부녀자를 위한 구호사업에 주력했다. [[1952년]]에는 삼동부녀회관(三同婦女會館)을 설립하여 전쟁 미망인과 윤락 여성을 구호하였고 [[1953년]]에는 100만평이 넘는 [[난지도]]를 사들여 '보이즈 타운'이라고 불린 [[삼동소년촌]](三同少年村)을 짓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고아들을 데려다가 양육하였다. 소년들이 시장(市長)을 뽑고 자체 은행권을 발행하는 등 유토피아적인 소년 자치도시였다. 난지도의 소년들은 1969년 물난리로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도 YMCA 사업의 하나로서 계속 운영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보건사회부 장관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YMCA 총무이자 '고아의 아버지'로서 전쟁고아 구호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3년]] [[10월 25일]] 삼동소년촌에서 고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히 눈을 감으셨다.
  • 김민희(1982) . . . . 1회 일치
         1998년, 무주고등학교 1학년 때 하굣길에 [[모델]]로 캐스팅되었다. 데뷔작은 10대를 타겟으로 했던 화장품 '지에닉' 광고[* [[강혜정]]도 출연했다.]. 무주중학교 때부터 [[농구]]선수로 추천받았지만, 본인도 [[모델]]을 꿈꿨고 키가 170cm에서 더 자라지 않아 불만이었다고 한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91700329133001&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9-09-17&officeId=00032&pageNo=33&printNo=16856&publishType=00010|#]]
  • 김재박 . . . . 1회 일치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668054|농구·축구도 김재박 눈에는 야구로 보여]]
  • 대전광역시/인물 . . . . 1회 일치
         * [[조동현(농구)]] - 중구(대전)
  • 박은수 (1956년) . . . . 1회 일치
         1991년 대구 볼런티어센터 소장으로 취임<ref>[http://www.dgvolter.org/ 대구볼런티어넷 센터 소개]</ref> 하면서 장애인 전용버스 운행, 장애인 카풀 운동을 펼치는 등 장애인을 위한 본격적인 사회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1993년 노인도 장애인도 탈 수 있는 지하철을 만들자는 대구시민단체협의회(노장지협) 사무총장이 되었다. 대구 종합자원봉사센터 소장, 달구벌종합스포츠센터 관장, 대구시 휠체어농구단 단장등을 역임하였다. {{출처|날짜=2010-4-15|2004년 한국장애인고용촉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장애인들에게 대기업 직원, 공무원 등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의성군 . . . . 1회 일치
         그리고 1995년 단 6명의 인원으로 전국대회 준우승을 일궈낸 의성여자고등학교 농구부도 한때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 창원시 . . . . 1회 일치
         프로스포츠 구단으로는 야구의 [[NC 다이노스]], 농구의 [[창원 LG 세이커스]], 축구의 [[경남FC]]가 있다. 경남FC는 엄밀히 따지면 창원만의 연고 구단은 아니지만 주경기장으로 [[창원축구센터]]를 사용한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창원시/스포츠]] 항목 참조.
  • 프로 스포츠 . . . . 1회 일치
         프로 종목은 흥행 때문에 규칙을 변경하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같은 경기의 아마 종목과 차별성이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로 복싱과 아마 복싱은 프로 단체와 아마 단체에서 스포츠의 '규칙'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기본적인 공통점은 있으나 동시에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경기가 되어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보호구로 헤드기어를 장착하는 아마 복싱은 프로복싱처럼 흥행에 도움을 주는 '화끈한 [[KO]]'를 내놓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고, 그 때문에 포인트와 기술 위주의 운영을 강요받게 된다. [[농구]]의 경우 [[NBA]]는 [[쿼터제]]나 [[덩크슛]] 같은 흥행 요소를 도입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 하정우(영화감독) . . . . 1회 일치
          * 발이 유난히 커서 별명이 '''왕발이'''였다. 발 사이즈가 무려 295mm... 군복무 당시 '''농구 선수 크기인 300mm [[군화]]를 신었을 만큼''' 발이 컸다. 이러한 왕발 때문에 영화 베를린 촬영 도중 자동차에 매달리는 장면에서 자동차가 코너를 돌 때 발이 쏠려 차체에 밟혀 고생했다.
  • 허준호(배우) . . . . 1회 일치
          * 1994년 MBC 《[[마지막 승부]]》... 명성대 농구부 주장 김만재 역
  • 황정민(남자배우) . . . . 1회 일치
         ||<#6495ed> {{{#white '''특기'''}}} ||[[농구]], 악기연주 ||
  • 히나타 쇼요 . . . . 1회 일치
         초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으로 본 카라스노 고교의 에이스 '작은 거인'을 동경해서 배구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유키가오카 중학교에 입학한 후 들어간 배구부에 부원은 자신 혼자였다.[* 실제로도 인원수가 모자라기 때문에 '부'가 아니라 동호회였다. 배구부가 된 것은 차후 1학년들이 입학한 다음 일.] 친구들에게는 여자 배구부라고/예쁜 여자 선배 때문에 들어간 거라고 오해받기도 했다. 그러나 부원 하나 없는 환경에서 근성으로 홀로 연습하기를 3년. 3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신입생이 세 명 들어와, 친구 2명[* 세키무카이 코우지(원래 축구부), 이즈미 유키타카(원래 농구부).히나타의 끈질긴 설득으로 대회에 참여.]을 포함해 경기를 할 수 있는 최소 인원수가 갖춰졌다. 그리하여 나간 생애 첫 공식전 1회전 시합 상대가 대회 우승 후보였던 키타가와 제1중학교였다. [[지못미]]. 시합 전 화장실 앞에서 상대팀 선수인 [[카게야마 토비오]]를 만나지만 ~~징크스의 시작~~ 그는 '배구에서 키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히나타를 도발한다. 히나타는 '나는 작지만 날 수 있다.'고 반박한다.
12158의 페이지중에 47개가 발견되었습니다 (5000개의 페이지가 검색됨)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